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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
 


  한신연 
 (개정증보판)교회사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2008년 9월 25일 출판


Kirchengeschichtliches Repetitorium

볼프강 좀머.데트레프 클라르 공저/
홍지훈.김문기.백용기 공역/367쪽/ 15,000원

졸업시험의 교회사 과목을 준비하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교수에게 교회사의 자료들을 엮어서 의미 있는 내용으로 만들어 복습하게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이를 위해서 개괄적으로 서술한 교회사 책이 필요한데, 이 책에서는 교회사, 교리사, 신학사를 모두 아우르면서도 중요한 연대표, 사건들 그리고 인과관계 등을 주제별로 묶어 한 눈에 싑게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상세한 교회사 연구로 나아가게 하는데 교회사적인 방향을 잘 설정하고 또 원자료에 접근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독일 노이엔데텔스아우의 아우구스타나 신학대학 교회사 교수 볼프강 좀머(Wolfgang Sommer)와 그의 제자이자 연구조교인 데트레프 클라르(Detlef Klahr) 박사의 공저인 이 저서는 교회사를 공부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20개의 중심분야로 구분하여 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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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소개

볼프강 좀머(Wolfgang Sommer)
1939년 베를린 출생. 노이엔테텔스아우의 아우구스타나 신학대학 교회사/교리사 교수로 근대 교회사, 신학사 및 슐라이에르마허 연구가 주요 연구분야이다.

데트레프 클라르(Detlef Klahr)
1959년 베르겐/첼레 출생. 노이엔테텔스아우의 아우구스타나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좀머 교수의 조교를 지냈다. 현재는 지역 루터교 감독(Superintendant)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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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정증보판에 붙이는 역자의 말

<신학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역사>가 제공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궁극적인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신학하는 안목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시대적인 넓이와 깊이 탓도 있지만, 역사를 보는 눈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사는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아이러니칼하게도 누구나 다 잘할 수 있는 과목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한 편으로는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도요, 동시에 가르치는 교수로서 <어떻게 하면 신학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역사를 비교적 일목요연하게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국신학연구소의 번역의뢰를 받고 이 책 초판(1994년)을 1998년에 번역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독일 노이엔데텔스아우의 아우구스타나 신학대학 교회사 교수 볼프강 좀머(Wolfgang Sommer)와 그의 제자이자 연구조교인 데트레프 클라르(Detlef Klahr) 박사의 공저인 이 저서는 교회사를 공부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20개의 중심분야로 구분하여 엮은 책이다.
지난 10년간 <교회사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은 각 신학대학 교회사 교재로 사용되어졌고 널리 호응을 얻었다. 처음 역자들이 이 책이 처음 독일에서 출판 되었을 때부터 앞으로 한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하면 교회사 강의에 크게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였던 대로였다. 이 책은 비록 교회사 전문 연구 서적은 아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잘 정리한 훌륭한 책이다. 레페티토리움(Repetitorium)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이 이 책을 읽고 숙지하여 교수와 구술시험을 치를 준비를 하도록 구성된 책이다. 초판에서 126개의 교회사 관련 문제들을 제공하였는데, 이 질문에 답을 만드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교회사의 중심주제들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하게 된다.
2002년에 나온 제 3판을 다시 번역하여 출판하기로 역자들이 뜻을 모았다. 저자인 좀머 교수는 많은 부분을 수정하였다. 그리고 이번 번역이 특별한 것은 볼프강 좀머 교수의 제자인 김문기 교수가 번역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제 1장부터 10장까지는 홍지훈 교수가, 11장부터 17장까지는 김문기 교수가, 마지막으로 18장부터 20장까지는 백용기 교수가 담당하였다.
변경된 내용을 따라 다시 번역하는 동안 과거 번역상의 문제점들을 다수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었다. 지난 10년간 사용된 초판을 읽고 오타나 오류를 교정해준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감사드린다. 이 책을 교회사 교재로 사용하는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책 여백에 교회사 사건과 인물 또는 개념들을 정리하면서 이 책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책은 평생 자신 만의 교회사 교재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2008년 8월  역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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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판의 머리말

졸업시험의 교회사 과목을 준비하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교수에게 교회사의 자료들을 엮어서 의미 있는 내용으로 만들어 복습하게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이 책에서는 중요한 연대표, 사건들 그리고 인과관계 등을 주제별로 묶어 한 눈에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교회사와 신학사의 기초 지식이 가장 장 드러나도록 의미 있는 내용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었다. 물론 교회사 시험에서 요구하는 질문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은 교회사 개관식 강의도 아니고, 교회사 편람을 만드는 일도 아니며, 전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강의하려는 것도 아니다. 원시 기독교에 대한 서술은 생략하였다. 왜냐하면 신약성서 시대 상황과의 관계가 특별히 고려되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이리조리 모아 놓은 <주입식 자료>만으로는 소기의 교육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용 서술이 빈약하더라도 사건이 지닌 문제점들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한다. 각 장의 서두에 등장하는 개요는 주요 항목들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의 역할을 하는데, 이 주요 항목들은 기초 지식을 함양하도록 내용적으로 잘 분류된 것이다.
각 장의 맨 끝에 제공되는 참고문헌 목록은 강의 진행을 위한 제언이다. 또한 습득한 지식을 점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교회사 시대별로 개괄적인 질문들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연습과정은 교회사의 기초 지식 습득에 도움이 될 것이며, 나아가 교회사를 이해하는 도구가 되기를 희망한다. 교회사 자료의 방대함에 막혀 체념하는 경우에 이 작은 <오술길>이 어느 정도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노이엔데텔스아우(Neuendettelsau)의 아우구스타나 신학대학 학생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밝혀둔다. 이 책이 잘 사용되기를 바라며, 무엇보다도 교회사에 관심이 있는 모든 신학대학생들에게 이책을 헌정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인쇄본을 만들어 준 칸초크(Frau Brigitte Kanzok)와 지버트(Frau Andrea Siebert)에게 감사드린다.

노이엔데텔스아우 1994년 3월
Wolfgang Sommer와 Detkef Kla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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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역자의 말
머리말
교회사의 중심주제에 관한 126가지 질문

1. 사도 교부 시대
2. 제2세기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흐름과 신학 조류    
3. 초대 가톨릭 교회의 설립과 그 신학 사상
4. 3세기의 그리스도교
5. 콘스탄틴 황제의 전환과 수도원 운동의 시작
6. 고대 교회 교리사 개관
7. 어거스틴(Aurelius 354-430)
8. 교황 제도의 성립과 비잔틴 제국 교회 약사
9. 게르만의 그리스도교화 - 그리스도교의 게르만화
10. 초· 중기 중세의 교황권과 황제권
11. 스콜라주의 신학, 신비주의 그리고 중세의 경건심
12. 중세 후기
13. 마르틴 루터의 발전과정과 종교개혁의 시작
14.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1530년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까지의 종교개혁사
15. 1530년 아욱스부르크로부터 1555년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에 이르는 종교개혁사
16. 신조(교파) 시대의 개관
17.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18. 프랑스 대혁명 이후 사회속의 교회 상황
19. 19세기의 경건사와 신학사
20. 20세기의 교회사와 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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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개)

13. 마르틴 루터의 발전과정과 종교개혁의 시작

개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는 15-16세기에 유럽의 정치적인 정황을 결정하였다. 칼 5세(Karl V, 1519-1556)는 그 이전 어떤 독일 황제도 누리지 못했던 권력을 소유하였다. 그의 전반적인 통치권은 바로 정치적인 영향의 관점에서 볼 때 유럽의 다른 권력들과 교황권에게 위협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 군주들의 권력의 이해관계와도 대립하고 있었다. 오래 전인 이미 15세기에 시작된 군주의 권력의 팽창은 수많은 지역 국가들을 낳게 하였다. 지역과 중앙 통치권 사이의 반목은 이미 1519년 황제 선거 때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종교개혁 전 시대에 영향을 미쳤다.
   더 많은 독립성을 추구하는 지역 군주들은 그러나 여전히 자기 영토 내의 귀족에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그들 없이는 경제적 면에서나 인적인 면에서 나라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가 없었다. 대 도시들, 특히 더욱 강력하게 된 시민 계급을 지닌 자유 도시들이 이러한 권력 구조에 들어왔다.
   정치적인 상황은 특별히 변화된 경제적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유용성과 목적의식이 도시의 시민 계급의 경제적인 삶을 결정하였다. 초기 자본주의적인 경제 형태는  자연경제를 더욱 배제하였다. 은행가 푸거(Fugger)가문의 상승된 지위는 16세기 초에 여러 차례에 걸쳐 엄청난 양의 자본으로 정치 판도에 영향을 끼쳤다.
   이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사적인 변화는 1500년경 독일 중부지역에 있는 루터의 고향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에른스트가문의 작센선제후국은 지역 군주들과 독일 제국 사이의 분쟁에 관여하였다. 작센선제후인 프리드리히 현공(Friedrich der Weise, 1468-1525)은 이 분쟁에서 자신의 지역통치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센선제후국에서도 확대되고 있는 광산은 사회적인 구조에 경제적으로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작센선제후국에서 더 늘어만 가는 사면부 판매도 마침내 부딪치는 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특색은 루터의 출생에 맞춰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 변화를 겪고 있었다는 것이 이다. 정신사적으로 14, 15세기의 개혁운동은 독일에서 종교적인 동기를 부여했던 인문주의처럼 도래하는 종교개혁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 교회 개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종교개혁가의 영향은 단순히 시대적으로 주어진 상황으로 축소시키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이처럼 다양한 역사적 상황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성적이고 바꿀 수 없는 점이 마르틴 루터의 삶과 영향이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집중적인 성서 연구에서 종교개혁은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주요항목

1555년까지 종교개혁사의 각 단계 개요

첫째 단계: 1517-1521

- 문서중심의 운동으로서 종교개혁(문서 전쟁, Schriftenkrieg).
- 사면부 논쟁과 루터에 대한 로마의 소송
- 하이델베르크 논쟁(1518년 4월)에 나타난 종교개혁적인 새로운 신학, 아욱스부르크에서 카예탄(Cajetan)의 심문(1518년 10월), 라이프치히 토론(1519년 6월부터 7월)과 종교개혁적인 주요 논문들(1520년).

둘째 단계: 1521-1524

- 역사 운동으로서 종교개혁. 자연적인 출발의 시대.
-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 지도 의 취리히 종교개혁.
-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의 좌파: 칼슈타트(Karlstadt), 뮨쳐(Müntzer), 영성주의자들과 재세례파.
- 루터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생활의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셋째 단계: 1525

- 종교개혁의 위기의 해: 농민전쟁.
- 자유 의지에 관한 루터와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 사이의 서면 논쟁.

넷째 단계: 1525-1530

- 종교개혁의 지역적인 확립.
- 더욱 더 자연적인 출발이지만 중심에 선 것은 이제 <통치권의>(von oben 위로부터의) 종교개혁이다. 루터교의 지역 교회제도의 시작.

다섯째 단계: 1530-1546/47

- 슈말칼덴 동맹의 도움으로 제국에서 종교개혁의 확장.
- 제국 국경을 넘은 북 유럽과 동 유럽의 종교개혁의 도입.

여섯째 단계: 1546/47-1555

- 종교개혁의 위기와 안정
- 슈말칼덴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는 패배한다. 1548년 아욱스부르크의 잠정협정(Augsburger Interim).
- 1552년의 파사우 조약(Passauer Vertrag)은 제국에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무승부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1555년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를 낳게 한다.  

수도원 입문까지 루터의 발전 과정(1483-1505)

- 루터 아버지의 조상들은 농부였으며 튀링엔 삼림지역의 가장 서부지역 출신이었다. 루터의 어머니는 아이제나하(Eisenach)의 시민 계급 출신이었다.  
- 루터의 아버지는 구리광산에서 일했으며 단순한 광부에서 제련 공장의 현장주임이 되었다.
-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공작령 만스펠트, Mansfeld).  
- 루터는 만스펠트(Mansfeld), 막데부르크(Magdeburg), 아이제나하(Eisenach)에서 학교를 다녔다.
-  사회적, 교육적 그리고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 루터의 가정환경은 중세 후기의 평범한 환경을 넘어서는 눈에 띄는 특별한 것은 없다.
- 루터의 유년 시절은 중세 후기의 신앙심의 영향을 받았다: 의롭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세상의 심판자인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어렸을 때 받은 교육과 신앙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 루터는 1501년부터 1505년까지 에어푸르트(Erfurt)대학 학예부(Artisten- Fakultät)에서 공부하였다. 7학예 공부는 소위 말하는 3학예(Trivium, 문법, 변증법, 수사학)와 4학예(Quadrivium, 기하학, 산술, 음악, 천문학)로 이루어졌다.
- 에어푸르트 대학 학예부에서는 옥캄주의(근대의 방법, via moderna)가 지배하였다. 루터를 가르쳤던 선생은 아이제나하 출신의 트루트페터(Jodocus Trutfetter)와 우징엔(Usingen) 출신의 아르놀디(Bartholomäus Arnoldi)이다.
- 1502년 가을 루터는 문학사(Baccalaureus der freien Künste) 학위를, 1505년 1월 7일에는 문학 석사(Magister Artium) 학위를 받았다.

루터의 수도원 입회부터 박사학위까지(1505-1512)

- 1505년 7월 17일 에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은자수도회에 들어갔다.
- 수도원 입회의 이유: 1505년 7월 2일 슈토턴하임(Stotternheim) 부근에서 벼락을 만난 것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외적인 동기이다; 이면에는 아무런 준비 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야 만하는 급작스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루터의 주위에서 일어난 죽음에 대한 체험(에어푸르트에서 흑사병)과 자신의 위태로운 부상.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배운 옥캄주의의 영향을 받은 루터는 수도사 생활에서 완전의 길을 통해 확고히 보장된 구원에 도달하기 원했다(facere quod in se est).
- 1507년 초 루터는 에어푸르트 주교좌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곧이어 다음의 저작들을 기초로 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60년 사망)의 명제(Sentenzen), 비일(Gabriel Biel)의 명제 주해(Sentenzenkommentar), 교의학에 대한 문제를 서술한 옥캄과 다이에(Pierre d’Ailly)의 질문들(Quaestiones). 순서에 따른 주석(Glossa ordinaria, 16세기부터 Walahfrid Strabo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짐)과 리라(Nikolaus von Lyra, 1340년 사망)의 성서해석서는 성서연구를 위해 사용되었다.
- 1508년 가을부터 1509년까지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예부에서 도덕철학 강의를 하였고, 그곳에서 신학사(biblischer Baccalaureus) 학위를 받았다.
- 1510/11년 겨울에 루터의 로마 여행. 이유: 독일의 어거스틴 수도회 내부의 규칙 논쟁. 로마여행은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발전에 어떤 의미도 없었다.
- 1511년 여름 루터는 결정적으로 작센 어거스틴 수도회의 최고 책임자인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 1468-1524)의 주선으로 비텐베르크에 왔다. 슈타우피츠는 1512년 10월 루터로 하여금 박사 학위를 받도록 고무하였고, 이어서 자신의 성서신학 교수직을 루터에게 넘겨주었다.
- 루터의 영적 시련(Anfechtungen)은 수도원의 경건 생활을 진지하게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이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 그리고 가슴 깊은 회개(contritio)를 스스로 성취할 수 없었다. 그는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스스로 자신에게 굽어있는 존재”(Auf-sich-selbst-Verkrümmtsein, incurvatus in se)인 자기욕망(Ich-Sucht)이 결정적인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판하고 징벌하는 하나님과 심판자 그리스도 앞에서 공포와 불안은 커져 갔다. 이 공포와 불안은 어거스틴에 의해 전해진 예정론에 의하여 한층 더 증폭되었다.
- 신학적으로는 고대의 방법(via antiqua)에 따라 교육을 받았고, 독일 신비주의와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에 의해 각인된 슈타우피츠는 수도원에서 루터의 가장 중요한 상담자였다. 어거스틴과 베른하르드에 관한 그의 조언은 루터의 관점을 심판자 그리스도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향하게 하였다.
- 루터는 최종적인 도움을 슈타우피츠로부터, 신비주의로부터, 보다 오래된 스콜라주의 신학으로부터도 받은 것이 아니라, 성서 연구로부터 받은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적 발견

- 루터가 1513년부터 1518년까지 했던 소위 말하는 초기의 강의들: 첫째 시편 강의(1513-1515), 로마서 강의(1515-1516), 갈라디아서 강의(1516-1517), 히브리서 강의(1517-1518). 새롭고 종교개혁적인 신학의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이 강의들에 담겨있다.
- 첫째 시편 강의는 4가지 성서 의미의 전통을 아직까지 고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문자적, 우화적, 존재론적, 종말론적 의미, sensus literalis, allegoricus, tropologicus, anagogicus). 루터는 특히 문자적 그리고 존재론적 의미(sensus litteralis, tropologicus)에 특별한 가치를 두었다. 신비주의의 영향은 소위 말하는 겸비의 신학(Demutstheologie)에 나타난다: 사람이 솔직히 자신을 죄인으로서 인식한다. 이러한 판단을 하나님이 인정하심으로, 겸손한 사람은 저주받은 인간에서 의로운 인간으로 칭함을 받게 된다(하나님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여기신다).
- 로마서 강의는 루터 신학이 결정적으로 더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훗날 루터는 롬 1:17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의(iustitia Dei)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자신에게 떠올랐다고 회고한다(1545년 그의 라틴어판 전집 제1권 서문). 그는 바로 그 때 거듭난 것 같았고 낙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이제 더 이상 능동적인 의로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수동적인 의로서 이해한다. 이러한 의롭게 여김을 받은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불러 일으켜진 믿음으로 일어난다.
- 루터는 성서 전체를 새롭게 발견하는 이러한 인식을 어거스틴의 은총론, 특히 그의 『영과 문자에 대하여』(De spiritu et littera)에 나와 있음을 알았다.
-이러한 종교개혁적인 발견의 시점은 연구가들 사이에 여러 각도로 논의 되었다. 일반적으로 1513년에서 1518년에 해당되는 초기와 후기 시점으로 말한다.

사면부 논쟁
  
- 중세 후기의 교회는 완성된 사면부 신학을 알지 못했다.
- 사면부는 고해성사의 세 번째 단계에 해당된다: 마음의 통회(contritio cordis),  입의 고백(confessio oris), 행위의 보속(satisfactio operis). 고해성사에서 죄는 사죄 선언을 통해 용서받은 후, 현세에서 받을 기한부의 교회의 형벌들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이것은 사면부에 의해 탕감 받게 된다. 요구되어진 회개행위는 교환할 수 있었다. 실제로 사면부는 교회의 형벌에서부터 면제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렸던 기한부의 죄에 대한 벌(질병, 전쟁, 기근, 연옥의 벌)까지도 면해 주는 것을 뜻했다. 교회의 처벌과 하나님에 의한 기한부의 벌 사이의 바로 이러한 짜 맞추기는 중세 후기 교회 사면부 제도(Ablasßpraxis)의 특징이다.
- 특히 총사면부(Plenarablaß)에서는 죄의 결과에 따른 죄와 벌에 대한 입장 사이를 확실하게 구별하지 않았다(죄와 벌, culpa et poena). 그 결과 사면부를 통해 또한 죄의 용서까지 받게 된다는 확신이 서게 되었다.  
-스콜라주의에서는 교황이 그리스도와 성자의 잉여 공로를 모아 둔 보화(선행의 보화, thesaurus  bonorum operum)에서 사면부를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교리가 형성되었다.
- 루터의 사면부 비판에 대한 동기는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가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을 위하여 발행한 소위 말하는 베드로 사면부였다. 교황 레오 10세(Leo X., 1513-1521)는 이 사면부를 1515년 막데부르크와 마인츠 대주교구를 위해 대주교 알브레흐트(Albrecht von Mainz, 1490- 1545)에게 넘겼다. 교황청과 아욱스부르크의 은행가 푸거 와의 계약에서 사면부 판매 대금은 알브레히트의 성직 매수와 교회법적인 연령규정의 미달을 무마하는 자금으로 지불되어야 했다.
도미니크파 신부인 요한네스 테첼(Johannes Tetzel, 대략 1465-1519)은 실재 판매를 넘겨  받았다.
-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95개 논제(사면부의 효력의 선언에 대한 논제,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의 직접적인 동기는 고해신부로서의 경험과 알브레흐트의 사면부 교본(Instructio summaria)에 대한 인식이었다.
- 사면부 논쟁에 관한 여러 글들: 콘라트 빔피나(Konrad Wimpina, 1518년 1월)에 의해 저술된 테첼의 반박문; 루터의 “사면부의 효력에 대한 논쟁 해설”(Resolutiones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 1518년 2월, 사면부 문제에 대한 루터의 학문적인 글); “사면부와 은총에 대한 설교”(Sermon von dem Ablaß und Gnade, 1518년 3월,국민들을 위한 사면부 비판); “교황의 지배에 관하여”(De potestate papae, Silvester Prieras에 대한 논쟁서); “오벨리스크”(Obelisci, 루터 논제에 대해 엑크가 자필로 쓴 입장); 작은 별(Asterisci, 엑크의 논박에 대한 루터의 자필 응답).

루터에 대한 로마 교회의 소송

- 1518년 6월에 추측건대 독일 도미니크회의 고발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루터는 이단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 파문과 출교의 효력에 대한 루터의 의견 피력은 1518년 8월 현저한 이단에 빠졌다는 소송 절차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60일 이내에 루터는 로마에 출두해야만 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은 루터 문제를 독일 영토 내에서 다루기 위한 협상에 성공하였다.
- 1518년 10월 루터는 아욱스부르크(Augsburg)에서 추기경 카예탄(Cajetan, 1469- 1534)으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두 가지 중심 테마: 루터는 교회의 보화가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와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한다(95개 논제의 제58항). 루터는 논쟁 해설(Resolutiones)의 제7항에서 성례전이 아닌 오직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에 대한 가르침과는 확실히 반대 입장에 있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 1518년 10월부터 1520년 6월까지 루터에 대한 소송은 약 2년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임박한 황제 선출에 있었다. 1519년 1월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사망하였다. 교황청은 스페인의 칼(Karl)이 새 황제로 선출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황제 후보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 1520년 6월 출교 위협 교서인 <Exs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 참조 시 10:12-역자 주)가 나왔다.
- 1520년 12월 10일 루터와 그의 친구들은 비텐베르크의 엘스터(Elstert)문에서 교회법전들과 스콜라 신학의 책들을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 출교 위협 교서의 사본도 불에 던져 버렸다.
- 1521년 1월 3일 출교서인 <Decet Romanum Pontificem>가 공포되고 루터는 파문당하였다.
- 뒤이어 1521년 5월 26일 보름스의 칙령에서는 루터를 독일 제국 국외로 추방한다고 하였다.

논쟁에 나타난 종교개혁 신학과 1520년의 저작들

-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er Disputation, 1518년 4월)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전개한다. 칭의론과 십자가 신학은 같이 있다: 타락 이후에는 자유의지란 아예 없다;  인간은 단지 악에 대한 자유만 있다(facere quod in se est에 대한 부정).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에서 비로소(resignatio ad infernum)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사색적이다.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은 권세와 세상의 지혜에 대한 연약함과 어리석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한다.
- 라이프치히 논쟁(1519년 6월 27일에서 7월 16일까지)에서는 칼슈타트(Karlstadt), 엑크 와 루터가 교황과 공의회주의의 권위에 대하여 논쟁하였다. 엑크(Eck)는 루터로 하여금 교황과 공의회들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유도하였다. 이로써 루터는 <후스파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논쟁으로 가톨릭의 교회론과의 단절이 나타난다.
-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 루터는 인문주의자들의 사이에서 지지자를 얻었다.  
이 인문주의자들의 동아리 출신으로 이미 1518년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그리스어 교수로 왔다. 그는 루터의 가장 중요한 동역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 『선행에 관한 설교』(Sermon von den guten Werken)는 종교 개혁적인 윤리에 관한 글이다. 십계명에 의거하여 루터는 신앙과 선행에 관한 새로운 관련성을 제시 한다: 첫째 되며 최고의 선행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에서 세속적인 행위와 거룩한 행위들 사이의 구별은 없다.
- 『그리스도교 상태 개선을 위하여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 1520년 여름)은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프로그램을 전개한다: 로마 교회의 세 개의 장막에 대한 분쇄: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 권력의 우위; 성서 해석에 있어서 교황의 독점; 공의회의 교황 단독 소집권. 이에 대해 루터는 항의한다: 세례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제직에 있다(신자의 만인 사제직). 이로써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이 사라졌다. 주교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루터는 세속의 권위에 요청한 것이다. 이 글의 둘째 부분은 개혁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교회국가, 성직자의 독신제 그리고 구걸의 폐지. 조직적인 빈민구제, 교육 제도의 개혁, 이자와 고리대금에 대한 거부, 독점기업과 공공의 악습에 대한 투쟁.
- 『교회의 바빌론 포로』(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는 특히 성례관에 대해 쓴 학문적인 글이다. 성례전은 약속(promissio)과 신앙(fides)에 의해 결정된다. 성례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지를 통해 증빙이 되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든 선포와 마찬가지로 신앙을 요구한다. 이 신앙과 더불어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verbum visibiles)이다. 이것은 말씀과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해진 7개의 성례전이 다 인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례전은 오직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제정될 수 있으며, 약속이 포함된 외적 표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 성찬 그리고 고해(나중에는 표지의 결핍으로 엄격하게 성례전으로 더 이상 간주하지 않음)는 성서적인 성례전들이다.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요소에 현재적으로 존재한다. 이 성례전의 은혜는 죄의 용서이다. 성찬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의 세 가지 포로: 평신도에 대한 배잔 금지, 화체설과 미사의 제사 성격, 이 글로써 루터는 중세 교회의 성례주의(Sakramentalismus)와 단절한다.
- 『그리스도인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520년 늦가을)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화>(Summe eines christlichen Lebens)를 언급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드리는 편지가 동봉되어 있다. 이 글은 두 개의 역설적인 주제로 구분이 되고 결정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인인 동시에 섬기는 종이다(고전 9:19에 의거). 칭의 신학과 그리스도론이 내적이고 외적인 인간의 긴장 속에 나타나 있다: 믿는 영혼은 자신의 죄, 불의 그리고 고통을 그리스도에게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에 참여하는 <기쁜 교환>을 통하여 소위 모든 경건한 행위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섬기는 종으로서 외적인 인간은 선행으로 이웃을 섬긴다. 그러나 선행이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고 오직 믿음이 의롭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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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orn-Schütte, L.: Die Reformation,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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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의 기원-2008년 9월 20일 출판(최신간)
웨슬리 영성 안의 복음주의와 신학- 2008년 8월1일 출판(최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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