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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
 


  김동진(2003-11-25 00:00:00, Hit : 14465, Vote : 3955) 
 종교 교양 서적을 출간할 ?계획입니다.


지난 10월 사랑하는 나의 아들 채우를 잃었습니다. 그 죽음을 계기로 느낀 바가 있어서 지난 40여일 간 글 쓰는 일에 매달려서, 지난 주에 드디어 탈고를 하였습니다. 제목은 “예수는 골고다에서 죽지 않았다”로 일단 정하였습니다. 현재 출간을 준비 중입니다. 예수를 정말로 죽인 사람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정통 가톨릭교회라는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가 예수를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원고 중에서 제가 후기(後記)로 쓴 글을 그대로 옮겨 드립니다.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못난, 고 김 채우의 아비 김 동진 올림



연 락 처: 경기도 김포시 감정동 662 효성 아파트 101동 605호

전    화: 031-986-7073

휴대전화: 019-556-7073

이 메 일: kmir@hanmir.com , kmir@dreamplus.net



글의 목차

글 머리에 - 또 다시 예수를 죽이고 난 뒤에야

1. 예수인가? 야훼인가?

2. 기독교의 비극

3. 교회의 원죄

4. 헛되지 않은 피

5. 빈 무덤

6. 바울- 기독교 신앙의 원형을 찾아서

7. 말씀대로 믿지 못할 이유

8. ‘말씀의 틀’을 넘어서

9. 예수 - 십자가의 하나님

10. 바울을 그리며 - 교회의 몰락

다 쓰고 나서 - 채우를 보내며



다 쓰고 나서

채우를 보내며



다 쓴 원고를 한 번 죽 읽어 보았다. 과분함에 나 자신조차 그만 놀라고 만다. 아무리 보아도 내가 쓴 글 같지가 않다.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자 나의 영원한 맏아들, 채우가 함께 쓴 글이다.



오래전부터 내가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이제 마무리 되어 참 기쁘다. 사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글에 매달려 있었다. 지금의 순서와 구상대로 씌어진 글을 꼭 한정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고, “뭔가 잘못된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번 써 보자는 것. 그리하여 내가 꿈꾸는 제 2 의 기독교 종교개혁을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시작해 보자는 것. 한국을 제 2 의 종교개혁의 원산지로 만들어 보자는 것.



처음부터, 바울은 내가 놓치지 않았던 나의 큰 별이었다. 보수적인 교회일수록 “바울! 바울!” 노래 부르는데, 내가 보기에 바울은 보수적이라기보다는 진보적이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소설을 써보기로 하였다. 소설이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글이니까……. 그러기를 수년, 결국 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신학서적도 두루 읽어 보았고,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그의 서신들을 수 없이 반복하여 읽어 가면서 그를 추적해 보았는데, 도대체 대충의 흐름은 잡겠는데 실마리며, 마무리며 너무, 너무 힘들었다. 수 없이 고쳐 써보았던 원고들. 그 때 나는 나의 무능을 탓하며, 또한 거기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는 나의 현실을 원망하며, 그 원고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몇 해 전부터, 나는 다음으로 교회로 주제를 옮겨서 이 작업을 계속 하게 되었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들을 비교하여 읽다보니, 나는 그만 사도행전의 바울은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역사적인 실제의 바울을 추적할 자신을 아예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깝지만 내가 전에 바울에 대하여 써놓았던 원고들은 폐기처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에 나는 예수의 부활을 계기로 이 땅에 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내었던 기독교 초기의 교회들을 추적해 보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의 근원을 한 번 파헤쳐보기로 하였다. 본래부터 나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일 자체를 기독교의 영광이 아니라, 기독교의 몰락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방향을 잡은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글로 옮기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초기 기독교의 교회 역사에 대하여 그리 아는 것도 많지 않았고, 이런 자료를 구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나의 아주 교만한 마음 때문에…….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아무도 꼼짝 못할 논리로 기독교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야 하겠다.”

는 마음으로 그 글을 써 내려갔던 것이다.  

“조그마한 결점도 허용할 수 없는 완벽한 글로써, 아무도 내 책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들어서, 내가 교회에 대하여 최후의 승리를 선언할 날”

만을 꿈꾸며 그 글을 써 내려갔던 것이다. 그 책이 성경책보다도 더 많이 팔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종언을 확실하게 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나의 이러한 교만한 마음이 채우를 잃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내가 그때 지금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글을 썼더라면, 나의 개인적인 삶은 아주 많이 달라졌을 터이니 말이다. 그랬더라면, 틀림없이 채우는 지금도 나와 같이 아주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이 글은 채우를 잃고 나서 대략 40일 밖에 걸리지 않고 완성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더더욱 채우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소원을 다 이룬 지금, 나는 그 아이가 더더욱 그립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조금만 일찍 끝냈더라도, 나는 그 아이에게 정말 잘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 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지만, 설사 안 팔리게 되더라도……. 어찌되었든 난 내 인생의 큰 응어리 하나는 풀었으니 말이다.



하기는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난 그 아이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결코, 지금과 같이 글을 엮어볼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하였다. 그 땐 내가 너무나 교만하였다. 그 아이의 죽음이 나를 낮아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전의 그 교만했던 마음은 다 사라지고, 그만

“그래, 나의 약함에 호소해 보는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내어 놓자! 아주 솔직하게 나를, 내 신앙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고서, 한 번 심판을 받아 보자! 내가 기독교를 심판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나를 심판하도록 만들어 보자!”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갑자기 뭔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쓰지 못하고 중단했던 글을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 것인지, 순식간에 감이 확 잡히는 것 같았다. 길이 훤히 뚫리는 것과 같은 암시를 받았다.



“그래, 바로 이 거야! 사도행전의 바울부터 죽여야 해! 그 바울은 너무나 권위주의적이거든. 진실의 바울이 전혀 아니거든. 그리고 그 다음은 예수! 예수의 부활에 군더더기들이 많이 붙어 있지. 그걸 털어 내야지. 거짓 예수를 죽여야 해! 그래야 정말로 예수가 바로 보이게 되거든. 그리고 그 다음은 또, 모세! 율법의 신, 모세! 성서의 모든 신화를 죽여 버리는 거야! 아참, 아담도 있지? 그래 인간에게 원죄는 없어! 예수께서도 아이들을 안아 주시면서, 아이들을 많이 축복해 주셨거든. 인생을 무한히 축복해 주셨거든.”

그 아이의 빈소에서…….  예전에 나는 그토록 글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서 애를 많이 먹었는데……. 이게 다 채우의 덕분인가?”



난 글을 쓰는 동안 너무, 너무 행복하였다. 채우는 글을 쓰는 내내 나와 함께하여 주었다. 어려울 때마다, 고비 때마다 그 아이는 나의 큰 힘이요, 의지였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주 많은 분노를 품고 살았다. “내가 그토록 꿈꾸었던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적인 신학자의 길을, 혹은 아주 신선한 진보적인 목회자의 길을 가지 못하였다”는 데에 대하여, 나는 나의 아내에게, 나의 어머니께, 또한 나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분을 품고 살았다. 나는 나의 그런 분노를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나의 자식들에게도 너무나 함부로 대하였다. 결국 채우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아내 사이의 갈등 속에서, 나와 어머니 사이의 갈등 속에서 나의 아들은 그토록 병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아이는 너무나 똑똑하고 반듯반듯하여, 보통의 아이들 같으면 충분히 그냥 넘어갔을 문제들도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 넘어가지 못하였다.



부부간에, 모자간에 갈등이야 있었지만, 우리 집에 무슨 그리 대단한 가정폭력이 난무했던 것도 아니고, 어머니와 나 사이에 신앙적인 노선 차이만 빼놓고서는 다른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다 별것 아니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 아이는 너무나 예민해서, 그런 것들이 마음의 상처로 쌓이면, 좀처럼 씻어낼 수 없는 아픔과 고통으로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그 아이에게 나를 이해하여 달라고만 요구하였으니……. 내 쪽에서 화해의 신호를 보내면 응당 나의 아들은 무조건 응해야 한다고, 너무나 성급하게 접근하였으니……. 결국 나의 무지와 성급함 때문에 나는 아주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아이는 정말 귀한 보물이었다. 수학을 정말 잘했다. 학교 시험은 물론이고, 난이도가 높은 경시대회에서는 그 실력이 더욱 돋보였다. 그 아이가 사는 김포시에서 수학경시대회는 그 아이를 위한 잔치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시 예선만을 한 번도 빠짐없이 통과하였을 뿐, 전국대회에서 입상한 적은 없지만, 그 아이의 시험석차는 항상 전국에서도 최 상위 수준이었다. 거기에다가 피아노도 잘 쳤으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사물놀이에 심취하여, 조금은 연주하기 어렵다는 상장고를 스스로 선택하여,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감탄할 정도로 정말 잘 쳤다고 한다. 난 그 아이가 장구를 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하여 정말 아쉽다. 그 아이가 사물놀이에 흠뻑 빠져서 열심히 장구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얼굴이 너무 해맑아서 “꼭 천사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고, 그 아이가 다니던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며, 담임선생님이며 모두들 찬탄해 마지않았는데……. 나는 그 보물이 너무 귀하고 소중하여 더 갈고, 더 잘 닦으려고 하다가 그만 통째로 깨뜨려 버리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 보물은 그냥 그대로 놔두었어도 아주 빛이 났었는데…….



한참 북한의 핵문제로 나라 안팎이 시끄러울 때, 그 아이는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아빠, 난 핵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주 쉬울 것 같아요.”

그 아이는 “아윈스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내게 말해주기도 하였다. 그 아이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공부만 잘하고 재주만 많았던 것이 아니라, 마음 씀씀이도 여간 아니었다. 남들이 싫어하는 굳은 일도 마다 않았다.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 화장실 청소 당번을 스스로 자원하여 1년 내내 아주 깨끗이 청소하여, 선생님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환경운동에 관심이 아주 높아서, 스스로 재활용처리 담당을 자원했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죽은 뒤로 아이의 학급 친구들이 그 아이의 빈 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고 한다.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하여 정말로 서운해 한다.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서도 눈 돌릴 줄 알고 정말, 정말 잘 키웠던 아이였는데…….  죽은 그 아이의 지갑을 열어보고서, 나는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고스란히 남아 있던 용돈! 그 아이는 그렇게 욕심이 없었다. 엄마나 나를 화나게 만들 정도로……. 그 아이의 죽음이 너무나 아깝다. 아깝다 못하여, 못내 원통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의 원통함을 다른 더 귀한 것으로 채워주신다. 그 아이의 죽음을 받아주셔서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게 하신다. 그 아이가 내게 보여준 사랑을 통하여, 그 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허락하시어, 나를 당신이 쓰시기에 딱 알맞은 종으로 삼아주신다. 아무려면 그 아이가 내게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만이야 하겠는가? 그러나 이 정도라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나의 글을 통하여서라도 그 아이의 이름이, 그 아이의 고귀한 희생이, 그 아이의 아름다운 사랑이 전해질 수 있다면…….



그 아이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나와 나눈 아주 중요한 대화가 있다. 난 그 대화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대화야말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생명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글쎄, 난 너를 참 이해할 수가 없다. 아빠가 너한테 뭐 그리 대단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한 번만 져 달라는 것인 데……. 아빠의 권위를 인정하여 달라는 것인데…….”

“권위요? 권위가 왜 있어야 하지요? 난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요? 아빠는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세요? 난 학교에서도 동급생들하고, 그리고 후배들하고는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겠는 데, 바로 그것 때문에 선생님하고, 선배들하고는 잘못 지내겠어요.”

“바로 너의 문제가 거기에 있는 거야. 일단 권위를 인정하라고! 집에서는 아빠의 권위를 인정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난 인정할 수 없어요. 권위는 원래부터 없어요. 없는 거 에요.”

“아니, 있다니까. 그럼, 넌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거냐?”



그 아이는 나에게 나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죽 털어놓았었다. 내가 그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게 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아이에게 함부로 화를 냈던 일들이며……. 칭찬에 아주 인색했던 일들이며……. 조그마한 실수에도 화를 벌컥 냈던 일이며…….



솔직히 나는 너무나도 많은 분을 품고서 살았으니……. 나는 좋은 아빠는 결코 아니었다.



“용서 못해요. 용서 할 수 없어요.”

“아빠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니?”

“잘못했다는 사람의 말이 그래요? 그리고 잘못했다고 말만하면 뭘 해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아빠는 앞으로도 또 그러실 터인 데……. 앞으로도 화를 버럭 내실 터인데…….”

“아니, 그럼, 내가 어떡하라는 것이냐? 내가 무릎 꿇고 너한테 빌기라도 해야 된다는 말이냐?”

“누가 그러래요? 아빠는 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화를 내지 말아야 하지요.”

“아니, 네가 지금의 내 말투를 갖고 그러는 것 같은 데, 사람의 성격까지야 어떻게 변하냐? 그리고 난 지금 화가 많이 나 있다. 너의 그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성격이 변할 수 없다고? 난 거짓말을 하였다.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하여……. 내가 왜 그랬을까? 혹시 이 말이 정말로 그 아이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것은 아닐까? 거기다가 나는 내 화의 근원마저 아이 탓으로 돌렸다.

“변할 수 없다고요? 아니, 변할 수 있어요. 사람은 변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빠는 변해야 해요.”

""아니, 안 변해! 난 못 변해!”

“그럼, 나도 변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순간, 나는 또 다시 화를 벌컥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자기모순에 빠진 나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그랬을 것이다.

“뭐라고? 이 자식이! 나는 단지 너에게 한 번만 져 보라고 말했을 뿐이잖아! 지기 싫어도 한 번 져보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넌 뭐야? 왜 이렇게 화를 내!”

나는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질러댔다.

“왜 아빠는 화를 내도되고, 왜 난 안 되는 거지요? 이게 다 아빠를 닮아서 그러는 것인데……. 닮기 싫어도 닮아서 그러는 것인데.”

아이도 지지 않았다.



난 그 때 분명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아들의 말은 “화를 참고 싶어도 참지 못하는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말이었는데, 나는 그만 “아들이 자신의 못된 성질을 아빠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생각 쪽으로 이미 삐뚤어져 있었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목청껏 소리 질렀다.

“아니! 이 자식이! 그 못된 성질을 아빠 탓을 해! 아빠가 그런다고 너도 그래. 아빠하고 너하고 같아! 임마! 그래서 너하고는 말이 안 통하는 거야. 아빠가 한 번만 져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못해 줘?”

“내 말이 바로 그거에요. 나도 아빠하고는 말이 안 통해요! 그럼, 아빠는 왜 나한테 져주시면 안 되는 거지요? 꼭 내가 먼저 져야 하나요?”



난 그 날, 권위에 복종하는 아들을 만들기 위하여서라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극히 공부도 잘하고 아주 모범적인 그 아들이 학교에서 전혀 뜻밖의 불미스럽기 짝이 없는 큰 사건을 만들어서, 학교에 불려갔던 일도 수차례 있었거니와, 이제 아들이 성장하여 사회로 진출할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고 보니, 아무래도 우리 가정보다는, 학교보다는 더 권위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에 이 아들이 조금이라도 쉽게 적응하려면, 뭔가 권위에 대한 이해나 수용만큼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하여 왔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것은 나의 이 아이에 대한 당면 교육과제였던 셈이다. 그것은 학교에서도 그 아이에 대하여 그렇게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야 나는 깨달았지만 사실, 교육은 그런 것이 아닌데……. 이 아이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그 방법은 가장 비교육적인, 가장 잔인하고 나쁜 방법이었는데…….  



우린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차례 몸싸움이 오고 간 뒤에……. 너무나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손이 버럭 올라갔는데, 그 날 아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전처럼 그냥 맞지 않았다. 나를 힘으로 밀쳐 내면서 완강히 저항하였다. 힘으로야 사실 내가 그 아이를 당해 낼 수가 있나? 187cm나 되는 큰 체구의 아들을.......



한참을 우리는 서로의 동정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해서, “내가 집을 나가야 하겠다.”느니, “이제는 아빠 없이 잘 살아 보라!”느니, 야단법석을 떨고 난 뒤에…….



그리고 수 십분 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 아이는 내게 이런 말을 남겼을 뿐이다.

“아빠, 난 졌어요. 결국 이 싸움에서 아빠는 이겼고, 난 졌어요.”

난 그 때 이 아이가 내 말을 좀 알아듣고서, ‘생각을 고쳐먹었는가 보다?’ 큰 착각을 하였다.

“이 자식아, 너하고 나 사이에 이기고 지는 것이 어디 있어? 네가 졌다면 그건 정말 네가 이긴 거고. 아빠가 이겼다면 그건 아빠가 졌다는 말인데,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아니에요. 아빠는 이기고 난 진 거예요.”

“이 자식이! 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아이는 슬그머니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문을 잠갔다.



난 그 아이의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사랑 그 자체였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아이는 아빠에게 조금도 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빠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 주었어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자기 자신은 뻔히 죽을 수밖에 없는 줄 알면서도…….



그 아이는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이 무의미한 싸움을 끝내기로……. 그 아이는 실수로, 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여 몸을 던진 그런 아이가 절대로 아니다.



난 지금 그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나는 반드시 져야 했으며, 그 아이는 반드시 이겼어야만 하였기 때문에……. 다만, 내가 부끄러울 따름이지. 내가 죽었어야 하였는데…….



그리고 보니, 내가 그 아이에게 손 댄 것이 꽤 오래전부터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손 대고 나서 그 아이와 나 사이가 확 틀어진 것이 너무, 너무 분명하다. 한 번도 내가 손을 대서 효과를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왜 자꾸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했을까? 잘 타이르면 정말 말을 잘 듣는 아이였는데……. 다 나의 권위의식 때문이겠지? 아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녀석이 꼴 보기 싫어서 그랬겠지? 내가 한 번 말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 보여야 속이 시원하겠는데, 그것을 통 하지 못하는 녀석이라서 녀석은 억울한 매를 가끔 맞았다. 그 아이의 가슴에 피멍이 드는 매. 아! 나는 정말로 나쁜 아빠다. 어쨌든 한 번만이라도 녀석을 꼭 무릎 꿇도록 만들어 보려고 난 그렇게 집착했던 것이다. 녀석이 그렇게 고집을 꺾고 바로 그렇게 무릎을 꿇는 날이 바로, 그 아이가 죽게 되는 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서 나는 그렇게 내 고집만 피웠던 것이다. 녀석은 그렇게 내게 한 번도 지지 않다가, 결국은 그렇게 너무나도 허망하게 져 버려서, 거꾸로 나를 완전한 패배자로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어차피 져서 마땅한 패배를, 그렇게 하여 얻는 나의 승리를, 나는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겨우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 불쌍한 채우야!



그 아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여 아빠를 살리기 위하여, 사랑하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리고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권위는 없다”는 귀한 진리의 말씀을 일 깨우쳐 주기 위하여, 그 스스로 자기 몸을 던졌던 것이다. 나야말로, 나의 분노야말로, 나의 권위야말로 우리 가정의 가장 큰 문제였으니까 ……. 그 아이는 수학도 아주 잘 하였지만, 세상의 이치에 대하여서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깨우쳐 알고 있었다.



난 그 아이의 죽음 뒤에 놓여있는 다른 중요한 배경들도 아주 잘 안다. 그 아이의 죽음 뒤에는 교회도 있었고, 학교도 있었다. 권위주의적인 교회, 권위주의적인 학교, 모두 일단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교회가 그 아이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난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말이야 성경적이지만, 나의 어머니의 율법주의적인 신앙은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만들었고, 나는 이에 맞서서 심하게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로 인한 나의 아픔이 그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신앙이 한국의 보수 기독교교회를 대표하고 있었다면, 나의 신앙은 좀 더 넓은 범위의 세계적인 진보적인 기독교교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 보수와 진보의 싸움에서 엉뚱하게도 나의 아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그토록 나는 나의 어머니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그 놈의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토록 죽이고야 마는 것인지?



도대체 내 신앙에 뭐가 문제가 있다고, 우리 어머니는, 한국의 교회는 나를 이토록 못살게 구는 것인지? 내가 “십자가의 예수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까닭에, 스스로 고난의 길도 마다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이에 크게 개의치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서, 다 “내 신앙이 잘못돼서, 내가 하나님을 잘못 믿어서, 하나님께서 길을 안 열어주신다”느니, 내가 보기에는 “이 땅을 그토록 병들게 만든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독선과 아집에 불과한 신앙!”, “남들과는 일체 화합하지 못하는, 분열과 싸움만을 조장하는 신앙!”,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을 하기보다는 정의의 신, 심판의 주를 앞세워서 남들을 미워하고 심판하는 데에 오히려 능한 신앙!”, ""말로는 '말씀대로!' 성경적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성경의 본 뜻은 철저히 외면한 채, 결국은 율법조문의 해석에 충실하여 사람을 잡고, 하나님을 잡는 아주 이상한 신앙”을 내세워, 그렇지 못한, 아니 그렇게 할 수 없는 나를 원망하고, 나의 신앙을 질책하니 도대체 이렇게 힘든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 말도 안 되는 ‘막가파’식 권위주의적인 믿음이나 무조건 강요하여 나를 아주 지치게 만들고, “내가 집사가 못되어서 창피하다”느니, 내가 쓰레기보다도 못하게 생각하는 것들로 나를 괜히 압박하고, 굳이 거리도 먼 그 놈의 큰 교회만 고집하여 마음에도 없는 교회에 매 일요일 마다 꼭 불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되고, 아이들도 그리 맘이 내켜서 교회에 나가는 것은 아니니, “할머니 때문에, 아빠 때문에” 가는 것이니, 아이들이 조금 꾸물거리다 보면 교회에 늦는 일도 흔히 있는 법인데, 그럼, 또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고…….  



하긴 모두 다 내 잘못이다. 나 혼자서 십자가를 졌어야 했는데……. 나 혼자서라도 아이들을 마땅히 지켜 주었어야 하였는데…….  

“아빠는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교회를 할머니께 효도하느라고 이렇게 흉내라도 내서 나간다. 너희들 때문에, 나 또 할머니한테 혼났다. 제발 좀 아빠를 봐서, 말 좀 들어 주어라!”

난 나의 아들에게 십자가를 나눠질 것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그 때보면 나는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인 종교, 유교의 신자였다. 나는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권위주의적인 믿음을 핑계로, 또한 유교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워 나의 아들에게 예수가 될 것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싸우면서도, 그것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매주 일요일 만날 때마다 싸우면서도 그렇게 교회에 나갔다. 그렇게 하다가. 싸움이라도 크게 한 번 대판 벌어지면, 또 교회에 발길을 뚝 끊었다. 그럼, 아이들도 자연히 나를 따라서 발길을 뚝 끊게 되고……. 그럼, 또 나의 어머니는 집요하게 나를 또......!



이 번 사고는 그렇게 발길을 끊은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되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고, 내 말은 그럴 바에야, 내가 아예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 백 번 좋았다는 말이다. 어머니가 뭐라 그러든 말든 다 혼자서 감수하면서, 아이들만은 내가 막아 주었어야 하였는데, 그것을 내가 하지 못하여 “아이들이 몹시 힘들었다”는 말이다.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변죽을 부리면서 “교회에 나갔다, 말았다 반복했던 행동 자체가 아주 나빴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와 나 사이의 갈등을 뻔히 드러내고서,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이 아주 나빴다”는 말이다. “내가 줏대 없이 놀아서 아이들의 영혼을 피곤하게 만든 것이 아주 나빴다”는 것이다. 나는 아주 나쁜 교인이었다. 어머니도 문제가 있는 신앙인이었지만, 나는 더 나쁜 신앙인이었다.



난 그렇게 어머니와 매주일 싸우면서도, 나의 아들에게는 나에게 일체 대들지도 못하게 하였다. 난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내가 할머니하고 싸우는 것은 이유가 있지만, 너희들이 나한테 대드는 것은 이유가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어머니와 싸우는 것이 몹시 싫은 데, 또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에게 대드는 내 아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정말 어머니와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그 놈의 신앙 때문에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정말, 정말 괴로웠던 것이다. 있지도 않은 천국이며 지옥 때문에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정말, 정말 힘들었던 것이다.

“난 할머니께 요구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할머니는 내가 도대체 들어줄 수 없는 요구만 하거든. 내가 할머니의 신앙이 잘못됐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는 데, 할머니는 내 신앙이 무조건 잘못되었데. 성경대로 믿으래. 그러니까 할머니처럼 믿으라는 건데, 난 그렇게 못 믿어. 너희들이 보기에도 아빠의 신앙이 잘못 되었니?”

이런 식이었다.



결국은 모두 나 때문이지만, 교회 역시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하여 분명한 책임이 있다. 그 아이의 할머니도, 나도 어쨌든 교인이었으니까……. 우리는 교회를 대신해서 그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똑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우리는 서로 믿음이 너무나 많이 달라서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제발 그냥 놔 주세요. 내 신앙에 아무 문제없어요. 사실은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문제가 있어요. 아세요?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요! 한국의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요! 그 동안 내가 이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했는데, 내가 말하면 화를 내실 것이 분명하니까 안 했는데, 사실 어머니 신앙에 문제가 많아요. 그래도 나 어머니 원망 안 해요. 왜냐하면 그 건 어머니 탓이 아니니까요. 다, 교회 탓이니까요. 이 땅의 싸구려 목사들 탓이니까요! 어머니의 그 잘못된 신앙도 다 교회 탓이라고요! 잘못 가르쳐 준 이 땅의 쓰레기 같은 교회 탓이라고요! 맹신과 광신만을 조장하는 그 못돼 먹은 교회 탓이라고요! 지금 어머니는 예수님도 믿지만, 하나님도 믿지만, 사실은 그 놈의 돼먹지 않은 교회를 믿고 있는 데,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요! 정말 문제가 많다고요!”



난 도대체 왜 그렇게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마는지, 그 이유를 잘 안다. 모두 구약성서의 신을 너무나 많이 믿기 때문이다. 야훼를 예수보다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아니, 같은 예수라도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보다는 부활하여 심판의 주로 오실 예수를 더 많이 믿기 때문이다. 바울은 “인간들의 마음이 곧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곧 우리의 마음에 있는 건데,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신을 믿으면, 그 사람 역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면, 그 사람 역시 사랑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예수라도 심판의 예수를 믿으면, 심판에 능한 사람이 되고, 사랑의 예수를 믿으면,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마귀의 눈에는 마귀만 보이는 법이다. 내가 야훼를 죽이지 않을 수 없는 진정한 이유이다. 내가 심판의 주, 예수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정한 이유이다. 내가 천국이며 지옥이니 교회의 장사밑천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지금도 그 아이에게 감사하는 것은 그 아이로 인하여 나는

“권위는 본래부터 없다.”

는 진리를 새로 깨우친 것. 그리고 나를 아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 바로 이 두 가지가 이 글을 완성하는 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니까 나의 이 번 글은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 채우의 글이 아닐 수 없다.



권위는 없다. 하나님마저도 우리에게 권위를 내세운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권위주의적인 종교들은 그 문을 닫아라! 사랑이 아닌 그 무엇도 하나님의 진리로 선포하지 마라! 십자가의 하나님, 예수께서 나가신다. 사랑의 종 바울이 나가신다. 사랑의 예언자 이사야가 나가신다.



권위는 없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권위주의적인 교사들은 오늘 당장 사표를 써라! 학교에 교회와 같이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학교문제로 인하여 우리 채우가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학교에 내가 달리 요구할 것은 없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인 교사만큼은 정말로 못 참겠다. 그들은 정말로 교육자 자격이 전혀 없으니, 당장 그 권위주의에 찌든 케케묵은 생각들을 청산할 마음이 정 없다면, 어서 빨리 학교를 떠나라! 내 요구가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학교가 죽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아니, 교사가 죽으면, 교육이 죽으면, 우리 아이의 미래는 없다. 한국의 미래는 없다.



그 아이는 살아서도 지극한 효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서까지 효도를 다하니, 난 정말 그 아이의 한없는 사랑에 어떻게 보답을 하여야 하나?



채우야! 다른 문제는 하나도 없단다. 다만, 네 엄마가 문제일 뿐이지. 아빠는 너로 인하여 이렇게 기쁜데, 이렇게 행복한데, 네 엄마는 아직도 너를 잃은 슬픔에서 영 헤어날 줄을 모른다. 너의 동생 한미르도 씩씩하기만 한데……. 그러기에,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지 그랬어! 이 녀석아! 최소한 네 엄마한테는 작별의 인사라도 하고 갔어야지! 이 못난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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